분노 (怒り, RAGE, 2016)
친구 집에서 함께 보게된 일본영화 <분노>. 개인적으로는 이야기가 짜임새 있고 탄탄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집중하기 쉬웠고, 의심스러운 세 명의 용의자 중 범인이 누군지 추리하게 되기 때문에 지루할 틈은 없었다. 나는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 제목처럼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이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감정소모가 심했다. 주제의식이 있고 추리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줄거리
도쿄에서 발생한 부부 살인사건의 살인자는 벽에 피해자들의 피로 그린 '怒(성낼 노)' 를 남겨둔 채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1년 후, 의심스러운 세 명의 남자가 주인공들에게 나타난다.
첫번째 용의자는 타시로(마츠야마 켄이치). 치바의 항구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가출 후 유흥업소에서 일하다가 아버지 요헤이(와타나베 케)에게 발견돼 집으로 돌아오게 된 아이코(미야자키 아오이)는 아버지와 함께 일하게 된 타시로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요헤이는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연고도 없는 타시로가 낯설고 의심스럽다. 남들과는 다른 내 딸 아이코가 그 사람 옆에 있으려하는게 눈에 밟힌다.
두번째 용의자는 나오토(아야노 고). 신주쿠에서 게이들이 원나잇을 하는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도쿄의 샐러리맨 유마(츠마부키 사토시)에게 발견돼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 후 동거를 하게 된 두 사람. 함께 지내면서도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고 갈 곳 없는 이 사람이, 유마는 점점 의심스러워진다.
세번째 용의자는 타나카(모리야마 미라이). 무인도의 폐허에 살고 있다. 오키나와로 이사 온 고등학생 이즈미(히로세 스즈)는 새로 사귄 친구인 타츠야(사쿠모토 타카라)와 무인도를 구경하던 중 그를 폐허에서 발견하게 된다. 자유롭고 친절한 타나카와 친구가 되는 두 사람. 하지만 이 사람이 왜 무인도의 폐허에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던 중, 범인을 쫓고 있던 경찰이 새로운 수배 사진을 공개하는데...
'내가 사랑하거나, 혹은 믿는 당신이 살인자인가요?' ... 세 용의자 중 과연 누가 범인인가?
리뷰
범인은 왜 부부를 죽였나
무더운 날, 범인은 일용직의 일을 구해 일자리로 향하던 중 일이 취소가 됐다는 통보를 받게된다. 힘이 빠져버린 그는 어느 집 대문 앞에 털썩 앉는다. 그 집의 주인이었던 여자는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자신의 집 대문 앞에 앉아있는 그를 발견한다. 안쓰러운 마음에 지쳐보이는 그에게 시원한 음료를 건넨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감사 인사가 아닌 무자비한 손이다. 여자는 죽게 되고, 뒤따라 들어온 여자의 남편도 살인자의 손에 죽게 된다.
범인은 왜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을 죽였을까? 저를 괴롭히는 햇빛, 취소되어버린 일.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다. 그런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마음은 그에게는 따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격지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혼자 자격지심을 느껴 화가 난 범인은 여자를 죽인다. 그런데 곧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다시 여자를 살리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남편이 집에 오자마자 그를 또 죽인다. 두려움과 분노의 연속이다.
범인은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사람이다. 범인은 제 마음에 들지 않고,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든 불편한 것들을 종이에 새겨 자신의 집 벽에 붙여놓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화가 나서 주체할 수 없으면 '분노'를 칼로 벽에 마구 새긴다.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에 똑바로 서 있는 것은 그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다. 그는 분노를 식히기 위해 물구나무를 선다. 매번 자신을 배신하고 좌절시키는 세상을 그는 멀쩡한 자세로는 감당할 수 없다.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를 피해 아무도 없는 무인도로 왔지만 세상을 마주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는 없다. 그는 또 사람과 세상을 겪게 되고, 불신하게 되고, 원망하게 된다. 그는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날카로운 돌로 벽에 또 분노를 새긴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세상에서 결국 우리는 선택해야만 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상대를 믿지 않은 자신에게 분노했고 상대를 믿었기에 분노하기도 했다. 나 역시 영화에 몰입되어 주인공들 따라 용의자들을 의심하기도 했고, 믿기도 했다. 믿음에서 불신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바뀌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믿음과 불신은 종이 한 장 차이임을 이 영화를 보고 느꼈다.
그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영화 후반부에서 아이코가 관객(카메라)을 빤히 바라볼 때, 나는 더욱 착잡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코의 눈이 그 순간 내 모든 관계를 떠올렸던 나에게 의문을 던졌다. 나는 내 사람들을 이 때까지 굳게 믿어왔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진심으로 믿고 있을까? 어떤 상황이 와도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잔인하고, 어렵다. 누군가를 믿어도 믿지 않아도 상처주고, 상처받고, 분노하게 된다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려면 선택해야만 한다. 누구를 믿고 신뢰할 지. 그 후에 내가 상대를 믿지 않아서 상처를 주고 받게 되는 것과 상대를 믿었는데 배신당한 것으로 인해 생긴 끔찍한 고통은 잔인하지만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고통 받은 후의 분노를 어떻게 다룰지도 결국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과 남을 파괴하면서 미쳐버릴지, 바다를 향해 악을 쓰고 소리치면서 분노를 뱉어버릴지, 펑펑 울어버릴지, 아니면 다시 일어나 세상을 한번 더 사랑하고 믿기로 결심할 건지. 인간의 삶은 어쩌면 분노와 고통을 다루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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